[편완식이 만난 사람] 영원한 DJ 정규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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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음악은 가슴이 살아있는 음악이죠”

장맛비가 지루하게 내리던 날 밤 경기도 양평 북한강변을 달렸다. 거세진 비가 갈 길을 막는다. 비를 피해 잠시 머물 곳을 찾아드니 넓은 테라스 너머로 사람들의 실루엣이 가득하다. 카페도 아니고 가정집도 아니다. 오디오 기기들 사이로 희끗희끗한 중노년층이 명상에 잠긴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그 중앙엔 턴테이블을 바삐 움직이며 무언가를 설명하는 이가 있다. 흠뻑 젓은 옷으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가 무언의 손짓으로 빈자리에 앉으라 한다. 일군의 문화예술 관계자들이 초청된 한여름밤의 별장 음악감상회에 불청객이 찾아든 것이다. 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 삼성문화재단 사장을 지낸 한용외씨, 사진작가 김영재, 박찬숙 전 의원 등 낯익은 얼굴들도 보인다.

영화 사운드트랙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호세 반담(프랑스 바리톤)과 벨기에 태생 프랑스 연극배우 안느 루셀이 열연한 ‘가면 속의 아리아’ 전편에 흐르는 구스타프 말러의 심포니 4번 3악장이다. 영화 속에서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음악감상회가 끝나갈 무렵 그가 다가와 차 한 잔을 권한다. 온 김에 음악감상이나 하고 가라는 눈치다. 선약도 잊은 채 선율에 빠져들었다. 영화 한편에 이처럼 주옥 같은 성악곡들을 절묘하게 버무려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말러가 뤼케르트의 시에 곡을 쓴 가곡 ‘나는 이 세상에서 잊히고’(Ich bin der Welt abhanden gekommen)가 엔딩을 비장하게 장식한다.

그가 말문을 열었다. “반담의 음성은 십수 년이 흘러도 여전히 긴 여운으로 다가와요. 여전히 마음을 뒤흔들어 놓지요.”

밖은 비바람이 더욱 세차다. 그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잊히고 있지요. 그토록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세상으로부터지요. 저는 떠들썩한 세상의 동요로부터 죽었어요.”

그는 1970∼80년대에 대학가 음악다방을 전전하며 DJ로 이름을 날렸다. 찬찬히 얼굴을 뜯어보니 연대 앞 독수리 다방에서 그를 본 기억이 가물가물 되살아났다. 바로 명DJ 정규호(62)씨다. 이종환·김광한·김기덕·서유석 등이 방송계 DJ 스타라면 그는 음악다방의 스타였다. 신촌로터리의 ‘할렘’, 이대 앞의 ‘캠퍼스’, 홍대 앞의 ‘카타리나’, 명륜동의 ‘로코코’ 등이 그의 주무대였다.

“다양한 꿈을 꿔야 할 시기에 저는 음악에 먼저 미쳐버렸어요. 학교가 파하면 당시 귀했던 전축과 LP가 있는 선배집에 들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음악을 듣고 또 들으면서 홀로 감동을 했어요.”

그는 음악이 자신의 마음을 가져가 버렸다고 회고했다. 탑골공원 근처의 돌체다방, 시청 앞 ‘수향’, 명동의 ‘설국’, 충무로의 ‘떼아르뜨’와 ‘필하모니’, 종로의 ‘르네쌍스’ ‘칸토’ ‘로방’ 등 음악이 좋은 곳엔 늘 그가 있었다.

“당시 음악다방은 팝, 클래식, 하드록, 프로그레시브록, 샹송, 칸초네, 포트송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메카였습니다. 저 스스로도 희귀 음반들을 수집해 소개를 했어요.”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는 함께 활동했던 독수리다방의 홍철, 할렘의 상돈이란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 다시 만나 그 시절의 DJ로 돌아가고 싶다. 

아날로그적 감성의 전도사이기를 자임하는 만년 DJ 정규호씨는 3000장의 LP명반을 소장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음악은 머리로 즐기는 ‘차가움’이라면 아날로그 음악은 가슴에 젓어드는 ‘따스함’”이라고 강조했다.
“카타리나는 귀한 음반이 많았고 사운드도 좋았어요. 자연스럽게 명동의 아방가르드 성향의 심미주의적 음악마니아들까지 몰려들었지요. 점점 예술인들까지 진을 치면서 명소가 됐어요. 지금은 헐려서 기억 속의 공간이 돼버렸습니다.”

음악다방은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장발 단속으로 대표되는 억압의 시대에 음악은 젊은이들에게 구원이자 위로였다.

군 제대 후 그는 경주에서 음악감상실 ‘시향’(詩響)을 열었다. ‘열정’이란 감상모임도 이끌었다. 박도식 가톨릭 신부, 조희대 판사 등이 멤버로 참여했다.

“학생들도 많이 참여하면서 불순한 모임을 하는 것으로 오해돼 경찰의 수사를 받는 해프닝도 있었어요. 동국대 한의대생들이 많았는데 젊음과 꾸준히 호흡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지요.”

몇 년 후 그는 대구에 음악감상실 ‘무언가’를 차린다. 손님이 많아지면서 음악카페 ‘탄호이저’로 규모를 키운다.

“음대생들과 음악을 좋아하는 열혈팬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음악을 공유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행복이던 시절이었지요. 어떤 여학생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몰래 감상실 탁자 위에 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기를 바란다는 메모와 함께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던가. 그의 LP음반수집량과 다양한 음악장르의 섭렵은 자타가 공인하는 수준이다. 미치지 않으면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그는 DJ로 전국을 누볐다. 제주의 ‘오랜지’, 춘천의 재즈록카페 ‘프로벤쟈’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2003년부터는 9년간 남한산성 자락의 목가적인 카페 ‘보고싶다 친구야’에서 DJ로 활동하기도 했다. 무언가를 구하기 위한 집착이 이니었다. 그저 목말라 나간 과정 자체가 목적인 당당한 길이었다. 사업에 실패했을 땐 은둔의 길이 돼주기도 했다.

“슬퍼도 행복하게 웃게 해주는 것이 음악입니다. 베토벤은 음악은 예지와 종교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높은 이상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고 했습니다. 바흐의 음악과 재즈는 우리의 은밀한 영혼을 부드럽고 때론 격정적인 선율에 실어 하나씩 풀어내는 자유로운 바람의 노래지요.”

요즘 아날로그·빈티지 소리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늘면서 LP판이 다시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는 DJ로 다시 설 수 있는 음악다방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마지막 보금자리 카페 ‘보고싶다 친구야’가 하남·위례 신도시 개발로 사라지면서 그는 떠돌이 DJ가 됐다. 작은음악회 해설 등 그를 찾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음악이라는 숲 속에서 바람을 맞으며 여행자가 되는 것이지요. 신성한 취기에 젖어있는 음악의 찬미자이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아날로그적 감성을 다시 말하고 있다. 건강을 위해 현미 등 거친 곡물을 선호하고, 정제된 설탕에서 맛볼 수 없는 사탕수수의 천연의 맛을 찾는 것처럼.

“디지털 음원이 감성이 제거된 차가운 음악이라면 아날로그 음원은 가슴이 살아 있는 음악입니다. 바이올린 현의 섬세한 울울마저도 파동으로 전해지는 것이 LP판의 매력입니다. 연주 실황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일부에서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듬어지지 않는 날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에 더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의 무위사상과 합치하는 지점이다. 그는 추억을 함께했던 이들이 다시 찾을 수 있는 명반과 함께하는 해설이 있는 음악 카페를 꿈꾸고 있다.

“음악은 추억이라는 낙원을 보존하는 은신처입니다. 젊은 시절 음악다방에서 인연이 됐던 부부들이 다시 꽃을 들고 DJ인 저를 찾아올 때 실감을 하게 되지요. 삭막한 세상에 위로가 됐던 겁니다.”

그가 전하는 세상의 훌륭한 음악들은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심처럼 사람들을 파고들고 있다. 예기치 않은 그와의 만남이 새벽이 돼서야 끝이 났다. 피아졸라의 아름다운 탱고 발라드 곡 ‘망각’을 마지막으로 들려주며 그가 빗속으로 사라졌다. 가슴에 스며들었다가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심장의 도둑’이다. 영원한 DJ 영원하라!

편완식 선임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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